날씨의 아이 : 현대 미술, 그리고 개봉 이후..

2024. 11. 10. 15:22Literature/영화, 애니메이션

Ref : 미디어캐슬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날씨의 아이>는, 사실 개봉한지는 좀 지난 영화이기는 하지만.. 내 의견과 비슷한 해석이 보이지를 않고, 마침 신약을 먹고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는 겸 이렇게 리뷰를 작성하게 되었다. 일단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지리라고 시사될 것이다.

 

Q1. 한 사람만을 위해서 도쿄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것, 다시 말해서 공리주의적 사고가 옳은 것인가?
: 이 부분은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으니,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물론 상세한 내용은 후술하겠다.

 

Q2. 일본 문화의 기저가 되는 메이와쿠(민폐)와 전체주의적 사고에 대한 반항을 표현하고 있는가?
: 메이와쿠는 잘 모르겠으나,. 전체주의적 사고에 대한 반항은 훌륭히 표현하고 있다. 물론 본토에서는 먹히지 아니하겠으나.

 

물론 공리주의적 사고에 대한 작품의 질문은, 단순히 트롤리 딜레마에서 오는 감정을 이끌어내 관객에게 몰입감을 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너 말고도 다른 사람들은 많아" - 다시말해서 인간천시에 대한 반항적 성격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시사된다. 그리고 전체주의적 사고에 대한 반향은 굳이 고학력 또는 숙련된 독자가 아니더라도 관객들이 잘 알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가지가 더 있다는 것이니...

Q3. 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개연성을 챙기지 못하였는가, 다시 말해서 관객들의 이해를 불편하게 하였는가?

 

Ref : TOHO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분명 전작 <너의 이름은>과 같이 독자들에게 이해가 쉽고 대중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낼 역량이 있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같은 일개 개인에 비하면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만큼 뛰어난 사람이다. (물론 그 전 작품들은 하나같이 개인색이 강하긴 했다만.) 그런데 상업적으로 뛰어난 성공을 거두어, 모두들에게 기대받은 후속작을 이렇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것이 궁금하여 이 영화를 여러번 돌려보기도 했고, 때로는 심도있는 누군가의 분석글을.. 그리고 때로는 디시인사이드 같은 약간은 제정신이 아닌 분들의 잡다한 글까지 읽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모두가 리그오브레전드를 재미있는 게임으로 생각할때 - 어느 개신교 학부모 단체의 회장이 "그.. 뭐냐, 제가 리그오브레전드라는 게임을 했는데 말이죠, 성경에 입각해서 제가 연구했을때 이런이런 점이 문제라더라~~" 라고 하는 일과 비슷한 모양이란 말이다.

 

그러나 <날씨의 아이>는 롤과는 달리 가상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더불어, 자고로 오타쿠의 참된 행동 양식은 이런 가상 세계에 빠져 지 멋대로 해석하고 히히덕 대며 굿즈를 사는 것이니, 나는 지금부터 나만의 음침한 상상을 하도록 하겠다. 나는 절대로 내 해석이 진리랍시고 교단을 창립해서 헌금을 걷을 의사가 없으니, 여러분들의 오해가 없길 바란다.

 

 

Ref : TOHO

해석 1 : 작품 <날씨의 아이>는, 그 자체로 현대 미술이다.


자고로 요즘의 현대미술이라 함은, 예술적 가치에 대한 상당한 논쟁이 있다. 예를 들면, 벽에 바나나를 청테이프로 붙여둔게 여러가지 이유로 고가에 거래된다는 등이지. 그러나 이런 현대 미술에도 모두가 공감 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가 있는데 - 바로 "작품을 만들기 전, 만드는 중, 그리고 만든 후의 작가/독자의 행위 마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담 이러한 요소가 <날씨의 아이>에 무엇이 있느냐가 주요 논점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논점들을 첨부하겠다.

1.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날씨의 아이>의 상업 개봉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 사실 이 부분은 정확히 어디에서 읽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그래서 뇌피셜이라면 여러분들에게 사죄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적어도 내 기억이 맞다면, 감독은 <날씨의 아이>의 상업 개봉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이었으나 토호 시네마가 상영을 추진했다고 알 고 있다. 이는 감독 마저도 이 영화가 흔히 말하는 "상업성"이 상대적으로 낮음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알 수 없이 갑자기 흘려지는 스가 케이스케의 눈물
: 작중 스가 케이스케는 한바탕 폭우가 쏟아지고 난 다음날, 형사의 추궁을 받던 중 그의 사무실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관객들은 대부분 여기서 갑자기 의문을 표하게 되는데 - 감독은 그가 죽은 아내를 그리워 하고 있음을, 또는 모리사마 호다카를 보고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음을 보여주는 장치들을 절묘하게 숨겨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이를 숨겼는가?
3. 권총을 든 모리사마 호다카의 대사
: "왜 방해하는 거야! 다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른 척 하면서!" 대부분의 관객은 이 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정도는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되지 않는다. 사실 필자도 처음 이 대사를 들었을때는 "?" 그 자체였으니. 그렇지만 이 대사가 내가 날씨의 아이는 그 자체로 현대미술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A 부터 Z가 될 것이다.
4. 관객들의 그다지 높지 않은 평점
: "우연이 너무많이겹친데다 등장인물들이 넘 단조로움...설명부족으로 대충 관객이 때려맞춰서 봐야함..." - dlst****님의 네이버 영화 평론이다. 그리고 그의 설명은 사실 어디를 비판할 건덕지가 없는게.. 우연이 겹친것도 사실이며, 설명 부족도 사실이다. 그러나 왜 감독은 우연을 연이어 만들었으며, 설명 부족을 의도(내 생각이다)하였는가?

 

종합해 보자, 감독은 일부러 설명을 불충분 하게 만들었으며 - 동시에 작중 개연성의 장치들을 일부러 보지 말라는 듯 꽁꽁 숨겨두기 까지 하였다. 후속작을 위한 떡밥을 던지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업 영화에서 이러한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대부분의 관객은 갈등-해소의 구조를 원하지, (처음봐서는) 알 수 없는 거시기 한 감정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Ref : TOHO

자, 여기서 3번 - 모리시마 호다카의 대사를 생각해 보자. 만약 이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르는 척 하면서!"라는 대사에 뜨끔한 관객이 만에 하나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1. 모리시마 호다카와 아메노 히나는 "돌봐줄 어른"이라는 존재가 없다
: 아, 물론 스가 케이스케가 속칭 "보호자"라 하면 할 말이 없다만... 내가 말하는 것은 경찰이 찾아 오더라도 그들을 돌봐줄 수 있는 어른이라는 것이다. 작중에서는 호다카-히나가 지켜줄 어른 하나 없이 생활을 이어나가는 방식이 매우 당연한듯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은 자신보다 더 좋은 조건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 물론 자본이라는 대가를 치르나 - 아메노 히나는 그들을 도와주는 대가로 물귀신이 된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호다카는 그녀를 구하려 한다,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니.
2. 결국 그들은 세상의 형태를 바꾸었다, 그리고 그들의 길을 걸어 나간다
: 그러니까, 대충.. 작중에서는 평화의 댐이 터진 서울 마냥 도쿄가 물바다가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관객들은 "저 썅놈/썅년이 도쿄를 물바다를 만들어서 세상을 망쳤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근데 도쿄가 물바다가 되서 인적/물적 손해가 난거는 저 멀리로 던져 놓자, 우리는 영화를 다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당신은 저 두 아이들이, 아니.. 청년들이 자신만의 길을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어른들과는 반대로 말이지.
3. 감독은 계속 아이들의 시선을 부정, 혹은.. 무시하거나 외면하며 눈물을 흘리는 어른들을 비춘다.
: 2회차쯤 됬으면, 물의 물고기를 본 아이를 이상한듯 보는 주부 아주머니를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가 케이스케는 더 말할 것도 없으니 생략하도록 하고.. 이것들이 시사하는 바는 굳이 말 하지 않아도 알리라.

 

종합해 보자. 돌봐줄 존재 하나 없는 호다카와 히나는 서로가 만나 기적적인 생활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물의 물고기, 그리고 아메온나에 대한 존재를 목격한 아이들에 대해서 어른들은 부정한다. 다시 말해, 감독은 물속의 물고기와 아메온나라는 소재를 통해 어른-아이의 시선 차이를 조명한다. 물론 스가 케이스케와 같이 그 아픔을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서 눈물을 흘리지만... 전체주의의 현실과 공리주의적 사고에 입각해 "어른의 훌륭한 합리적 판단"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호다카와 히나는.. 아이들의 시선을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르는 척 하면서" 지내는 어른들을 뚫고 - 기여코 자신들만의 길을 개척해 낸다. 어른들이 몰랐고, 모르는 척 했고, 무시했던 자신들을 지켜줄수 있는 사람을 지켜 냈다. 더불어 어떤 모습이었던 간에, 그들은 세상의 모습을 여러가지의 의미로 바꾸는 데에 성공했다. 감독은 그런 그들을 돕기 위해서 우연과 기적을 만들어 낸다. 그런 주인공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그들의 길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하늘이 존재한다면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내려주기 위해서, 주변 인물들이 차례차례 그를 도와주게 된다. 형사들 마저 호다카를 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관객들에게 있어서 부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박한 평점을 남길 것이다. 이로서 다시 한 번 어른들이 몰랐고, 모르는 척 했고, 무시했던 가상 세계의 호다카와 히나는 "이해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어른들에게서 잊혀진다. 그렇지만 그들의 시선에서 집중해서 다시 한번, 그리고 다시 한번 보게 되면.. 숨겨진 것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게 되고, 잊혀져 가는 주인공들은 차근차근 눈에 보이게 되고, 결국 그들의 행동을 용납하게 된다. 아니, 용서하게 된다.

 

<날씨의 아이>라는 작품은 그 자체로 아이들의 시선에서 만들어 졌으며, "어른들이 모르고, 모르는척 하는"그들을 위해 만들어 졌으며, 영화 또한 그러한 아이들과 마찬가지인 존재가 되어 예술적인 특징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상업 개봉을 꺼려 한 것도, 호다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스가가 눈물을 흘린 것도, 호다카의 대사도 이해가 되며 동시에 어른들의 반응인 "평점"마저도 하나의 예술이 되는 것이다. 마치 행위 예술적 성격의 현대 미술처럼 말이다. (물론 오해 없길 바란다, 내가 연출/스토리적 측면에서 날씨의 아이가 완벽한 작품이라는 것이 아니다.)

 

 

Ref : TOHO

 

해석 2 : 두 주인공이 바라는 것,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


날씨의 아이가 개봉한지 대략.. 4~5년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몰랐고, 모르는 척 했던 두 주인공의 꿈이자 바라는 것 :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는 우리 세계에서 실현 되었을까? 두 주인공은 성공적으로 어른이 되어, 다시 또 다른 그들을 지켜낼 수 있게 되었을까?

옛날과 요즘 취업 온도는 차이가 있다. 예전에는 신입이 모르는게 있었다면 가르쳤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모른채로 신입으로 들어왔냐고 욕한다. "신입"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데도 말이다. "너 아니여도 할 사람 많아"가 아직도 통하는듯 했다.
매년 집을 나와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은 전국적으로 2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청소년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중 30%는 청소년 관련 기관의 보호를 받지만 나머지 70%는 거리에 방치된다. 방치된 가출 청소년들은 가출팸으로 ‘운명공동체’를 맺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생활비와 유흥비 마련을 위해 절도를 시도하거나 조건만남 등 성매매에 빠지기도 한다. 특히 여자 가출 청소년들은 성 착취를 노리는 파렴치한 이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세계일보, 2018.03.22 기사 中

 

과연 우리사회가 인간 존엄의 사회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다. 필자의 생각엔 이러한 흉악 범죄가 만연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우리사회의 인명경시 풍조인 사회적 병리현상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자신과 타인의 존엄한 생명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사회적 병 때문은 아닐까? 인명경시 풍조가 보편화되고 극심해지면 죄의식 또한 사라져 또다른 비극을 불러올 수 있다. 또한 이웃간 불신이 쌓이면서 우리사회의 근간인 공동체라는 울타리마저 붕괴될 수도 있다. - 남도일보, 김덕형(무안경찰서) 독자 투고 中

 

사실 <날씨의 아이>는 일본에서 나온 애니메이션이지만, 우리 사회에도 적용해도 크게 문제가 없을것 같아 보인다. 우리 근처를 떠도는, 고통받는, 모멸당하는 아이들은 "어차피 이 반도/열도에는 아직 사람이 득실득실 하므로 신경쓸 대상이 아닌"듯 보였다. 어른들이 무시했고, 종교/가정불화/재정 등의 이유로 고통받은 아이들은 다시 어른이 되었지만 이미 존재하는 어른들에게 또다시 무시받고 있었다. 인간 존엄, 인간 존엄.. 인간 존엄같은 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지 의문이다. 결국 호다카와 히나가 꿈꾼 -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잊혀지지 않는 세상,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듯 보인다. 출산율, 자살율.. 뭐 굳이 이런 자극적인 지표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알 수 있으리라.

 

날씨의 아이는 10월 30일 다시 재개봉 했고, 지금도 상영 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영화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다시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까,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이 영화를 보고 자란 입장이니, 기회가 된다면 4K 화질째로 NAS에 넣어둔 다음 대대 손손 물려주고 싶다. 부디, 우리의 과거였던 자들을 잊지 말아달라고.

 

 

Ref : 미디어캐슬

마치면서 :  찬사, 아쉬움, 그리고 내가 작가라면..


마치면서, 이 훌륭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주신 신카이 마코토 감독에게 감사를 전한다. 물론 완벽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취향이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했고, 연출적인 측면이나 스토리 전개 및 배경음악 사용에 있어서도 아쉬운 점이 많았다. (물론 나는 일개 글쟁이요, 관람객이다. ) 다만 위에서 서술했다 싶이 잊혀진.. 그리고 애써 무시 당하는 이들을 조명한 감독에게 박수를!

 

그리고 생각이 든 것인데.. 만약 스토리 라인을 아래와 같이 바꿨으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마노 히나의 능력을 알게된 불상의 단체, 혹은 기타 등등이 일행을 쫒는다. 아마노 히나는 결국 물귀신이 되고, 호다카는 불상의 단체를 피해 철길을 달리며 토리이 밑을 지나 아마노 히나를 구하기 위해 하늘세계로 간다. 하지만 호다카는 도쿄가 물바다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고, 히나와 자신의 목숨을 맞바꾸게 된다.

다시 평화로워 진 도쿄.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 호다카는 사후세계에서의 도쿄를 마주하게 된다. 그곳은 제 2의 현실이라 할 만큼 정교했지만, 딱 한가지 다른 점이라면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는 점. 그곳에서 호다카는 타키의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목숨을 맞바꾼 것은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는 법, 할머니는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는 토템을 호다카에게 준다. 물론 시간을 돌리면 현실의 도쿄는 물바다가 되겠지만.

차마 도쿄를 물바다로 만들 수 없었던 호다카는 다바타역 인근을 걸으며 고민한다. 그때,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날씨를 맑게 하고 있었던 아마노 히나. (유사 엔딩 장면)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될 히나를 본 호다카는 눈물을 흘리며 시계를 다시 되돌리고, 히나의 손을 잡으며 영화는 마치게 된다. (Grand Escape -> 괜찮아)

어떤가? 바뀐 시나리오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드는가? 아니면 너무 뻔한가?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갔으면.. 호불호가 더 강해질지는 몰라도, 감독이 원래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더 부각됬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랬다면 위에서의 해석 1번은 의미가 없어지겠지만. 어쨋든 팬으로써의 입장이다.

 

그러면 리뷰 끝!